달달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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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핀터레스트

 

이제 이 블로그는 개발에만 국한된 블로그가 아니라,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일지를 작성해 나갈 블로그가 될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은 20살 때였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에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단순히 바로 취업하고 돈을 벌게 해 준다는 이야기만 듣고,

 

친구 따라 특성화고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쯤에 내 주변에 몇 명은 대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

 

나도 함께 동요되어 대학을 가야 하나라는 마음이 커졌다.

 

다들 가고 싶은 과가 있었고, 뭔가 나도 가고 싶은 과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당시 나의 학교 과 이름은 '자동화 모델링과'였다. CAD나 선반 밀링 등 기계와

 

관련된 실무작업을 습득해주는 과였고, 이 분야 자체가

 

대학에서는 기계공학과랑 연관이 제일 많아

 

나 역시 '그럼 기계공학과로 가면 되겠네.. 그럼 내 꿈은 기계공학자야!'라는

 

줏대도 없고 생각 없는 꿈 정하기를 시작했다.

 

생각도 깊지 않고, 자극적이고 재밌는 걸 찾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공부에 재미를 붙인 시기여서 대학을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실업계 야자를 신청하고 들었다.

 

하지만 이 공부는 3개월도 안 돼서 힘들다는 핑계로 그만둔다.

 

그러면서 당시 고졸 전형으로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간 선배들을 보게 되었다.

 

어차피 대학교는 대기업이나 공기업 갈려고 거쳐가는 곳이 아닌가?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던 나는

 

더 쉬운? 방법으로 대기업 혹은 공기업에 들어가야지!라는 생각으로 대학입학을 포기했다

 

(당시 운 좋게 캐나다 어학연수 기회가 주어져서 학교에서 보내주었는데 시기가 겹쳐버려서 입학을 안 한 것도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15년 2월에 졸업하게 된다.

 

'공기업에 들어가면 돼'라는 마음으로 NCS 기출문제집을 풀면서

 

동시에 넣으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공기업에 지원하게 된다.

 

놀랍게도 두 달 뒤에 나는 한국가스공사 안산본부에 붙게 된다.

 

이때 당시만 해도 내 인생 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에 대한 할 말은 많지만, 

 

5개월 인턴을 하고 정규직 전환에 실패해서

 

떨어지게 된다..

 

그 후로 21살 12월 전까지

 

술과 클럽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제일 철없고, 두려울 게 없는.. 나는 언젠간 좋은데 붙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말 그대로 현실을 회피하면서 인생을 즐겼다..

 

그리고 12월에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군대에 들어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업에 실패했던 애,

 

비트코인을 연구하는 애(이 당시 비트코인 붐이 일어나기 전이였다),

 

요리를 하고 왔던 애,

 

여자친구를 길게 교제 중인데 상태에서 입대한 애,

 

해외에서 자라다가 온 애

 

전라도, 경상도에서 태어난 애 등등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난 그중에서 공기업에서 근무해 보고,

 

캐나다에서 연수를 경험했던 애였다.

 

그냥 자기가 사회에서 그나마 자부했을법한 일을 말해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게 나는 자주포 K-55 정비병으로써 근무하게 된다.

 

일은 좋았다. 휴가도 많이 주고, 대신 손톱사이사이에

 

기름이 묻는 게 좀 그랬지만, 견딜만했다.

 

나는 자대 선임들과 동기들과 일을 한 것이 아닌

 

다른 포대 아저씨(다른 포대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이다)들과

 

즉, 선임이 아닌 사람들과 군번 상관없이 지내며 정비를 하였다.

 

물론 그곳에서도 서로 계급은 존재했다.

 

훗날, 자대 취사병이 자리 하나가 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내가 취사병 선임과 친했기 때문에,

 

취사병 제안을 받게 된다.

 

정비에 싫증이 나고, 그리 아저씨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는

 

취사병 제의를 받게 된다.

 

그리고 나름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생각에 정말

 

설레었었다. 

 

하지만, 난 칼질을 살면서 해보지도 않았고, 요리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선임은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며, 칼질하는 법, 간장 베이스,

 

고추장 베이스 등등 군대 짬밥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알려준다.

 

우리 부대는 식수인원이 80명 안팎으로 (훗날 40명 정도만 된다. -> 부대 해체로 인해)

 

취사병은 1 ~ 3명으로 충분했다.

 

매일 연등(밤에 공부를 할 수 있게 사지방을 열어준다)을 신청하여,

 

나는 한식조리기능사를 따려고 공부했다.

 

요리라는 직업을 계속 검색하고 공부해 보니, 정말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리 유학에 대한 꿈도 생겨 호주유학에 대한 정보도 찾아보았던 것 같다.

 

그렇게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요리사의 꿈을 쫓아갈 때쯤

 

모든 취사병 선임들이 전역을 하게 된다.

 

취사병은 나 혼자 남게 되었는데,

 

겁났지만,

 

나는 혼자서 모든 인원들의 밥을 책임지게 되었다.

 

칼질은 눈감고도 했으며, (허세가 아니다)

 

간을 제대로 볼 줄 알고,

 

국에 시원한 맛을 낼 줄 알고,

 

병사들이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고기 잡내를 어떻게 없애는지 등등,

 

이 모든 걸 정말 간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취사병으로 전역하게 되고,

 

가끔씩 연락하는 동기들은 아직도 내가 만든 "돼지고기김치볶음"을 그리워한다.

 

내가 그거 하나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역을 하고,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기 위해, 신사역에 있는

 

메밀소바 집에서 일하게 된다.

 

아직도 여기서 일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같이 다녔던 직원과 아직도 연락하고,

 

여기서 나올 때는 내가 여름에 힘들다고 말씀드리고 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게 나오게 된다.

 

훗날, 다시 그 소바를 먹고 싶어 여자친구와 찾아갔을 때는 예전에 있었던 직원들이 반겼고,

 

서비스를 주었다.

 

소바집을 일하기 전에는,

 

러시아 여행과 코성형(코가 낮은 게 콤플렉스였다.)을

 

하기 위해 인력소에서 3개월간 막일을 하였고,

 

친구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도 가게 된다.

 

처음으로 태어나 얼굴성형도 해보았고,

 

그 후 용돈벌이를 위해 첫 주방 알바인 프랜차이즈 치킨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지금도 만나고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다.

 

내 인생의 황혼기였다.

 

모든 게 다 잘될 거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후에 소바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 치킨집 점장님이 사정이 좋지 않아 인원수를 줄였다..

 

소바집을 그만둔 이유가 있었는데,

 

사건은 내가 첫 예비군 훈련을 갈 때부터였다.

 

훈련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서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나와 예전에 고등학교 때 캐나다 어학연수를 같이 다녀온 김모모였다.

 

너무 반가워서 서로 맥주를 한잔 하고,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기타로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고, 자기 만에 기타를 중국에 가서 만들 생각인데,

 

괜찮으면 자기와 함께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자기 업계를 통해 많은 음악적 아티스트를 많이 만날 수도 있고,

 

자기를 서포트해주는 매니저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애가 내가 알던 김모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있었고,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 인연이라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거의 몇 개월간 이 친구의 술친구만 된 것 같았다.

 

매일 허무맹랑한 잘되면 너한테 얼마를 준다.

 

얼마 안 남았다..

 

매일 일 진척도에 대한 얘기를 허무맹랑하게 말하는 몽상가에 불가한 애였다.

 

얘를 도와 페이스북 생성 꾸미기, 블로그 꾸미기,

 

스마트스토어 꾸미기,

 

마케팅 쪽 공부한다면서 안양에서 블로그 마케팅?(불법적인 일 같아서 도망침) 등등

 

도와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페이도 안 받고 무슨 생각으로 걔를 믿고 도와줬나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시간낭비였다.

 

아마 그 자식과 4~5개월을 함께한 것 같다.

 

나는 여기까지만 하고,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며 좋게 연락을 서로 끊었다..

 

허세로 가득 찬 녀석에 달콤한 말에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하지만, 오히려 사람을 보는 눈이 이때부터 생겼던 것 같았다.

 

아 맞다.. 이 이야기는 소바집을 그만둔 사건이라 말했는데,

 

내가 이 자식의 같이 일하자는 제안으로 소바집에서 그만둔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휴..

 

아무쪼록 그렇게 그만두고 나서 다음 일하게 된 것은 바로,

 

가전제품 설치 부기사였다.

 

당시 친동생이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아빠 아는 분 소개로 가전 설치 부기사를 하지 않겠냐고 제의를 받고 일하게 되었는데,

 

1년 정도 일하고 나보고 괜찮은 일이라고 자기 대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동생은 그만두고 싶어 했다. (훗날 다시 가전제품 부기사를 하고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그때도 고민중였던 탓에 용돈벌이를 생각하여,

 

가전제품 부기사를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익숙해지면 쉬운데,

 

처음 일했을 때는 무슨 미친넘이 하는 일인 줄 알았다.

 

그냥 한마디로 둘이서 냉장고, 세탁기, 티브이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아파트가 아닌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에 큰 냉장고를 설치하면,

 

그날은 많은 힘을 써야 하는 날이었고,

 

바쁘면 점심도 못 먹는 일이었다.

 

허리 다칠까 봐 허리 복대를 차며 일을 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냐고?,

 

희망이었다.

 

어느 순간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거보다는 이 일이,

 

사수가 되고 일이 많으면, 한 달에 600 이상 챙길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600은 그때나 지금에 나에게나 물론 큰돈이었다. 그래서

 

뭔가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돈이었다.

 

게다가 일이 없는 날에는 오후 1시쯤에 끝나는 날도 있어서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든 일이었다. 그것마저)

 

내 인생 처음으로 한 곳에서 1년을 일했던 직업이었다.

 

그때마침 스마트스토어 붐이 일어나던 시기였는데,

 

나 역시 돈의 관심이 많아지던 시기였고,

 

동시에 엠제이 드마코의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을 읽게 된다.

 

아마 이때가 내 인생의 제1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돈의 대한 생각과 직장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 역시 책의 주인공처럼 아무도 없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 

 

무언가 돈이 될만한 걸 만들어 보자는 마음이 강해졌다.

 

물론 지금 가전설치를 하는 게 힘들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든 것도 큰 작용이었다.

 

그래서 사수님께 일을 그만둔다고 말했고,

 

가전설치 업계에서는 원래 퇴직금이 없다고 한다..

 

신고하면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 순진무구 바보였던 나는 혼자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퇴직금 40만 원 정도 받고,

 

그와 작별을 한다..

 

그때 퇴직금을 받으려고 녹음도 하고 신고도 하려 했지만,

 

하.. 차마 같이 일했던 사람한테 그렇게 못할 정도로..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인지..

 

그날 여자친구 앞에서 많이 울었다.

 

돈도 못 받아낸 내가 한심하고 너무 불쌍해서 말이다.

 

나 역시 퇴직금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수가 되려고 했으니, 퇴직금 괜찮아 어차피 사수자리 내어주신다니

 

그 내어주는 값으로 하지 뭐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사수가 될 생각이 없으니,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내 손해인 것 같은 생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간사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가전설치 일을 통해 얻은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서

 

내가 받지 못한 돈을 꼭 받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가전설치와 작별하고,

 

부의 추월차선처럼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생각이 없었다.

 

떠나서 환경을 바꾸면 내가 어떻게든 먹고살만한 방법을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생각하면 정말 저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20살 때 친구 아버지 추천으로 한의원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원래는 친구 아버지가 친구한테 알바를 시키려 했었는데,

 

친구가 안 한다고 나한테 하라고 준 알바였다.

 

저녁에 그냥 한의원에서 자리를 지키고, 저녁에는 잠만 자고 아침에 밥 배식만

 

하면 되는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꿀알바였다.

 

그때 한의원 알바를 했던 기억을 살려,

 

생활비를 벌면서 내가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더욱 안정적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의원 알바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마침 코로나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안 그래도 알바 자리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의원 알바도 면접을 보고 합격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그래서 한의원 공고가 올라오면 직접 전화를 걸어 오래 일할수도 있고,

 

한의원에서 일해 본 적 있다며 필사적으로 어필했다.

 

정말 간절했기 때문이다.

 

두 번의 한의원 면접...

 

서울권이라 다 떨어졌다.

 

그런데, 경기도 화성에 한 한의원 공고가 하나 올라왔다..

 

거리도 먼 것이 딱 혼자 공부하기 알맞아 보였다.

 

여자친구도 동행한다길래 바로 화성을 1시간 30분 정도 걸려 갔다.

 

면접을 보고 그날 합격 소식을 듣게 된다.

 

청소할 양은 꽤 많았지만, 익숙해지니 금방금방 처리하게 되었다.

 

잠은 그곳에서 자고, 공부는 카페나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

 

그때 돈이 될만한 건 막 찾아봤던 것 같다.

 

스마트스토어는 아쉽게 하지 못했다..(어려워 보여서)

 

티스토리 글을 쓰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글도 써보고(그게 지금 이 블로그가 되었다.)

 

유튜브에 피아노 노래를 올리며 유튜브에도 도전하며(저작권에 걸려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

 

헤헤.. 나름 열심히 돈이 될 수 있는 걸 찾아다닌 것 같다.

 

부작용으로 비트코인을 하다가 돈을 날렸지만... (이때가 불장일 때라 붐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다가 티스토리 블로그를 좀 이쁘게 꾸미려고 스킨편집을 할 때였다.

 

편집을 하는데, 이 편집을 HTML로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외계어들은 뭘까.. 하다가 흥미가 생겨 인터넷에 쳐보았다.

 

그러다 보니 마크업 언어 -> 즉 웹을 만들 수 있는 언어

 

라는 걸 알게 되었고, 아하 이런 걸로 웹사이트를 만들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부의 추월차선에 나오는 엠제이 드마코 역시

 

웹사이트를 만들어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나는 프로그래밍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조사를 해보았다.

 

그 과정에서 웹보다는 앱 만드는 게 훨씬 재밌어 보였다.

 

그래서 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책도 사게 된다.

 

앱을 만들어 돈이 될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재밌어서 시작하게 된 게 컸다..

 

이 마음이 너무 소중하여, 앱을 만들게 된다.

 

이와 관련된 직업을 알아보니 안드로이드 개발자라는 직업이 있었다.

 

현재 개발자 수요도 부족하고, 연봉도 괜찮은 직업이었다.

 

그렇게 흥미가 생겨 거의 4~5개월 동안 앱을 만들게 되는데,

 

당시 흡연자였던 내가 이 앱을 만들면서 열중하여,

 

동시에 담배도 끊게 된다.

 

그렇게 나의 첫 앱 "그만"이라는 금연앱을 만들게 된다.

 

현재 서비스를 하지 않았지만,

 

난 이 앱을 포트폴리오 삼아 김포에 있는 한 스타트업에 취업을 하게 된다.

 

이게 내 한의원에서 일어난 6개월간에 과정이다. 나는 혼자 독학하여

 

안드로이드 개발자가 되었다.

 

그렇게 이직도 하여, 소개팅 앱도 만들고, 

 

또 이직하여(연봉을 올리기 위해)

 

옷 사이즈를 측정하는 앱을 만드는 회사도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내가 이 정도에 돈을 받다니.. 하는 내 기준에 높은 연봉을 받게 된다.

 

그렇게 안드로이드를 시작한 지 2년 정도 흐른 현재시점이다.

 

이제는 안드로이드 개발자 모임에도 나가고,

 

우리 집 옆집에 사는 안드 개발자분도 만나 지금

 

사이드 프로젝트도 진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직도 가능했고,

 

최근까지 면접을 보러 다녔다.

 

연봉은 더욱 높이 불러주었다.

 

그 화성에서 6개월이.. 나를 개발자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퇴사했다.

 

이직을 하기 위해 면접에 합격했음에도 고민 끝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직장인을 바라던 게 아니잖아라는 고민이었다.

 

내가 처음에 화성에 갔을 때,

 

나는 부자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 컸다.

 

그런데 나 역시 두려웠던 모양이다. 현실적으로 부자가 어떻게 돼?

 

라는 마음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괜찮은 직업이잖아라는 생각에 그냥 저걸로 먹고살아도 나름

 

괜찮게 사는 것 같은데? 라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앱을 만드는 동안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무엇인가 이렇게 몰입한 적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 것도 내가 화성에서 금연앱을 만들고 있었을 때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앱을 개발할 때는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열심히 해봤자 똑같은 월급의 상한선을 받을 터인데,

 

나에게 동기부여가 크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나만의 앱을 가지고 싶었다.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좋아했던 일이 나의 직업이 되면 그건 더 이상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이 말에 동감한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나 역시 그것을 동경했고, 내 20대를 좋아하는 일을 찾아 헤맸다.

 

근데 이 것은 나한테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지 않다.

 

이 것이 나의 진심이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적게 일하며, 남는 시간 동안 내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개인 시간을 보내며 살고 싶다.

 

너무 욕심 같은가? 누구나 바라는 거 아니냐고?

 

그럼 당신들은 왜 그걸 바라는 사람들을 나태하고, 미래가 걱정된다고 하는가?

 

우리 대부분은 위와 같은 삶을  바란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저 자체가 게으르고, 부지런하지 못한 삶이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나는 이제 퇴사를 하면서 솔직해지려고 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면서 시간을 많이 확보해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좋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도 많이 주면 좋다.

 

허나 거의 그런 일은 없고, 있다 하더라도 과연 아래 밸런스 게임에서 당신은 1번을 선택할 수 있을까?

 

1. 월급 300 평생 받으며 하루 8시간 내가 좋아하는 일 하기

2. 월 1000만 원 벌고 하루 한 시간 그런저런 일 하기

 

자 1번은 당신이 좋아하는 직장인의 삶이다.

 

연봉은 더 오를 수 있다.

 

내가 퇴사를 한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출퇴근 시간 포함하여 하루 8시간 이상을 회사를 위해 보낸다.

 

30년을 기준으로 주 5일동안 일을 다닌다고 쳤을때, 

 

자는 시간 하루 쉬는 시간(2~3시간)이라고 칠때,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려 22년정도가 된다.

 

우리는 회사를 위해 살아가는 건가? 그나마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위안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더욱이 2번을 고를 것이다.

 

월 100을 번다해도 2번을 고를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겐 시간이 돈 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떠한가? 나와 같은 생각인가? 다른 생각인가?

 

나는 2번을 골랐다.

 

그렇기에 다시 그때 화성처럼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일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도전한다.

 

이번에는 직장이 목표가 아닌 내가 대표가 돼서 말이다.

 

다시 한번 한의원 알바를 구하고,

 

짐을 맡길 15만 원 고시원을 구해

 

여기서 글을 쓰고 있다.

 

이번에서는 시흥 배곧에서에 시작이다.

 

다시 새롭게 도전해 보자.

 

다시 이야기를 써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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